막걸리

 

양미숙

 

“옛다, 이거 쓰고 다녀 오니라.”

밭일 하시던 아버지는 당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던져 주셨다. 한낮이 지났는데도 햇볕은 뜨겁게 내렸다.

“괜찬은디요.”

대꾸하면서 땀내 나는 모자를 머리에 썼다. 아버지는 심부름을 시키면서 마음에 걸리셨던지 모자를 벗어 주셨다.

지폐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빛바랜 양은주전자를 들고 길을 나섰다. 기차역까지는 꽤 멀었다. 어린 아이가 걷기에는 힘든 길이었다. 울퉁불퉁하고 자갈 깔린 길에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일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나면 화가 나서 돌멩이 하나를 걷어 찾다. 더위에 축축 늘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풀 사이 어딘가로 돌멩이가 떨어졌다. 풀 위에 앉아 있던 먼지가 일어 돌멩이가 날아간 곳이 어디인가를 알려 주는 듯 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거친 비포장도로에 오늘은 지나가는 차가 왜 이렇게 많은지 자꾸 짜증이 났다. 어쩌다 만나는 나무그늘 밑에선 느릿느릿 걸었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모자에서는 아버지의 땀내가 내려왔다. 주전자에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었다. 리듬을 만들어 흔들어 보고 노래도 흥얼거려 보았더니 덜 심심했다. 어느덧 저만치 기차역이 보였다. 기차역이 불을 지피는 아궁이 옆에 있는 것처럼 이글이글 했다. ‘이제 들녘 하나만 더 지나가면 기차역이다’ 생각하며 서둘러 가려고 잠시 뛰어 보았지만 지친 다리는 더 무겁고 어깨는 내려앉았다. 길가에 있는 풀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땡볕에서 일하고 계시는 아버지 모습은 잊은 지 오래였다. 처음 길을 나설 때는 아버지 걱정에 얼른 다녀오려고 했다. 농사일을 하면서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싶다고 서둘러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기차역 옆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에 들어섰다. 낡은 선풍기마저 덜덜거리며 지친 듯 돌고 있었다.

“누구 아들이당가. 철외떡 둘짼가? 아부지 심부름 왔능가?”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나를 잘 아는 듯이 반겨주었다. 막걸리를 주전자에 퍼 담으면서 이것저것을 물었다. 더위 속에 오느라 고생했다며 눈깔사탕 하나를 입에 넣어 주셨다. 아주머니의 칭찬 때문인지 달콤한 사탕 때문인지 피로가 사라졌다. 돌아가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잊게 되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걸음도 가볍게 한참동안 신나게 걷다보니 입 안의 사탕도 점점 작아지고, 빨리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야겠다는 내 각오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갈수록 주전자는 더 무거워지고 따라서 내 다리는 지쳐갔다. 쉬어 가려고 잠시 길가에 앉았다. 달디 단 사탕을 먹었으니 목이 말랐다. 물대신 막걸리 한 모금을 마셨다. 쿰쿰하고 텁텁한 맛에 뱉고 말았다. 호기심에 먹어본 맛이지만 실망스러웠다.  

한참을 걸으니 목이 다시 말랐다. 알고 먹은 막걸리 맛을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목이 마르던 참이라서 두어 모금 삼켰다. 한 모금만 더 먹을까? 시원한 것이 먹을 만한 맛으로 느껴졌다. 걸을수록 발걸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목이 마르고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한 모금씩 마셨다. 이렇게 조금씩 마셨는데 아버지가 알아차리실 수는 없을 것이다.

기차역에 갈 때와는 무엇인가 달랐다. 먼지 날리며 달리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보면 웃음이 났다. 춤을 추는 엉덩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밭이 저 멀리 보이자 나를 기다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다녀온 듯 잰 걸음으로 걸었다.

문득 주전자 뚜껑을 열어 확인하고 싶었다. 아뿔싸, 주전자의 막걸리가 절반 밖에 없었다. 어디다가 흘린 적도 없고, 내가 먹은 것은 조금씩, 조금씩 몇 번 마시지도 않았는데….

물끄러미 아버지가 날 들여다보셨다.

“햇볕에 익었다냐? 얼굴이 벌겋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난 히죽히죽 웃었다.

 

아버지 무덤 앞에 앉았다. 막걸리 한 잔 따라 봉분에 뿌려 드리고 내 잔에도 막걸리를 채웠다. 목을 타고 오르는 뜨거운 기운에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계간수필≫(2008년)로 등단. 토방동인. 압화공예가.